약 90년 전,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가 개봉했습니다. 영화 제목에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대공황 속에서 새로운 산업 시대가 노동자들에게 안겨준 비참한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근대화의 위험성을 다룬 이 영화는 유성영화 시대가 시작된 지 거의 10년이 지난 시점에도 무성영화에 가까운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주연은 물론 각본, 감독, 제작, 음악까지 직접 담당한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은 할리우드가 향해 가던 새로운 흐름에 의도적으로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모던 타임즈》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로, 채플린이 연기한 ‘떠돌이(The Tramp)’가 공장 기계에 갇혀 있습니다.
1936년 무렵, 채플린은 자신이 처음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걸음마 단계였던 영화계에서 20년 넘게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 산업이 만들어 가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남자를 반복해서 연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산업의 최대 수혜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그는 긴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아들 찰스 채플린 주니어(Charles Chaplin Jr.)는 저서에서 이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끊임없이 요동치던 그의 마음은 매달릴 만한 새롭고 흥미로운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세계 일주 여행 중 방문했을 때 깊은 인상을 받았던 동양을 다시 찾기로 했습니다.”
채플린과 함께 하노이로 여행을 떠나기 전, 두 사람이 함께 출연한 영화 《모던 타임즈》의 홍보 사진에 등장한 폴레트 고다드(Paulette Goddard).
1936년 2월, 할리우드의 황금기가 한창이던 시기에 《모던 타임즈》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개봉했습니다. 영화 홍보 일정을 마친 채플린은 공동 주연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고다드와 함께 아시아 여행에 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베트남 남부에 도착한 뒤 북쪽으로 이동해 하노이로 향했습니다.
두 사람은 프랑스 해운회사 메사제리 마리팀(Messageries Maritimes)이 운항하는 아라미스(Aramis)호를 타고 4월 13일 아침 사이공(Saigon)에 도착했습니다. 이후 프놈펜(Phnom Penh)과 앙코르(Angkor)를 거쳐 달랏(Đà Lạt), 다낭(Đà Nẵng), 후에(Huế)를 지나 하노이로 향했습니다. 채플린과 고다드는 4월 29일 저녁 하노이에 도착해 프랑스 구역의 응오꾸옌(Ngô Quyền) 거리에 있는 메트로폴 호텔(Hôtel Métropole)에 머물렀습니다.
하노이 역시 채플린이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지만, 나름의 ‘근대’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건물과 전차, 영화관, 신문, 학교, 철도가 일상을 바꾸면서 도시는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 채플린이 풍자했던 조립식 생산라인과 대량 실업이 만연한 산업 사회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통킹(Tonkin)이라 불리던 이 지역에서는 프랑스 식민 통치 아래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계층이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1936년 4월 하노이를 방문한 채플린과 폴레트 고다드가 머물렀던 메트로폴 호텔(Hôtel Métropole).
채플린이 거닐었던 하노이의 풍경은 오늘날에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을 본떠 지은 두 첨탑의 성 요셉 성당(St. Joseph's Cathedral)은 여전히 구시가지의 대표적인 명소이며,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Hanoi Opera House)는 메트로폴 호텔 바로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홍강을 가로지르는 롱비엔(Long Biên) 다리에는 지금도 기차와 차량이 오가고 있으며, 붉은색 테훅(Thê Húc) 다리는 호안끼엠(Hoàn Kiếm) 호수의 가장 눈에 띄는 명소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영화가 하노이에 처음 소개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무렵으로, 당시 문화적 변화를 겪고 있던 이 도시에서 새로운 오락거리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메트로폴 호텔은 하노이 시민들에게 영화를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베트남 신문 《뚜오이째》(Tuổi Trẻ)에 따르면, 1916년 6월부터 이곳에서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으며, 그중에는 채플린의 영화도 있었습니다. 4년 뒤인 1920년 8월, 바끼에우(Bà Kiệu) 사당 옆에 하노이 최초의 영화 전용 상영관인 파테(Pathé) 영화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언론인 응우옌 응옥 티엔(Nguyễn Ngọc Tiến)은 저서 『하노이를 걷다』(Walking Across Hanoi)에서 초기 하노이 영화관에서는 무성영화만 상영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서부 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를 시작으로 유성영화가 등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노이의 영화관 좌석은 계급에 따라 나뉘었습니다. 1등석과 발코니석의 관람료는 1.00~2.00인도차이나 피아스트르로, 당시 하노이 노동계급의 하루 수입인 약 0.50피아스트르보다 몇 배나 비쌌습니다. 2등석은 약 0.50~0.80피아스트르, 3등석은 0.30~0.50피아스트르였습니다. 이러한 가격을 고려하면 영화 관람은 하노이 노동계급에게 부담스러운 오락이었습니다. 채플린의 영화에 등장하는 노동자들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정작 그의 영화를 볼 여유조차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프란시스 가르니에 대로(Boulevard Francis Garnier) 모퉁이에 있던 파테(Pathé) 영화관입니다. 1933년 ‘르 바리에테(Le Variétés)’로 이름을 바꿨으며, 채플린이 훗날 들러 술 한 잔을 즐겼던 타베르느 로얄(Taverne Royale)도 같은 거리에 있었습니다.
1936년 무렵, 하노이에서 채플린은 이미 누구나 아는 유명 인사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연기한 ‘떠돌이’ 캐릭터의 프랑스어 별명인 ‘샤를로(Charlot)’에서 유래한 ‘삭로’라는 이름으로 인도차이나 전역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채플린과 일행은 호안끼엠 호수 옆, 당시 프란시스 가르니에 거리(Boulevard Francis Garnier)에 있던 타베르느 로얄(Taverne Royale)에 들러 술 한 잔을 마시며 쉬어갔습니다. 《하성오보》(Hà Thành Ngọ Báo)는 채플린이 그곳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줬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는 당시 하노이에서 유명인 문화가 싹트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또 다른 날에는 폴레트 고다드와 함께 항쫑(Hàng Trống) 거리 46번지에 있는 떠이호(Tây Hồ) 염색 가게를 방문해 비단과 옷, 기념품을 구입했습니다. 9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 거리는 비슷한 물건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명소로 남아 있습니다.
채플린은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와의 대화를 계기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계화가 인간에게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켰고, 이를 급변하는 세상에 대한 자신의 우려와 연결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모던 타임즈》의 핵심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산업화와 실업, 노동자의 희생을 대가로 효율과 이윤을 추구하는 체제를 비판했습니다. ‘떠돌이’는 채플린의 초기 영화에서부터 고난을 겪어 온 익숙한 인물이었지만, 《모던 타임즈》에서는 그의 고군분투가 한층 복합적인 의미를 띠었습니다. 채플린을 둘러싼 세상의 변화도 캐릭터에 반영되면서, 이전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불안과 불확실성이 더해졌습니다.
베트남 작가 탁람(Thạch Lam)은 한 인터뷰에서 채플린과 나눈 대화를 회상했습니다. 당시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며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어떻게 경련을 일으키고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탁람은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습니다. “우리 땅에는 기계도, 공장도 전혀 없습니다.” 이 대화는 채플린이 영화에서 그린 산업 사회와 그가 하노이에서 마주한 현실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신령의 행렬(Procession du Génie)’이 하노이 구시가지를 지나가는 장면을 담은 사진. 탁람이 채플린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당시 이 도시에서는 기계 없이 모든 화물을 사람의 힘으로 운반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와 하노이 사이의 공통점은 탁람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노이의 풍자 작가 부쫑풍(Vũ Trọng Phụng)은 같은 해 『운 좋은 놈』(Số đỏ)을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은 “새롭게 등장한 친프랑스 성향의 북부 상류층”부터 “하노이 구 상업 지구의 더러운 보도”에 이르기까지 도시의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주인공인 ‘붉은 머리 쑤언(Xuân Tóc Đỏ)’은 자신의 능력이나 본모습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에게서 무엇을 본다고 믿느냐에 따라 출세합니다. 《모던 타임즈》에서는 현대 사회의 기계 시스템이 너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한 나머지, 개인이 그 체제에 어울리는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두 작품 모두 겉으로는 진보한 사회처럼 보이려 애쓰는 현실을 희극적으로 풍자하는 동시에, 그 허상에 갇힌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버림받을 수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사이공의 보수 성향 신문 《랭파르시알》(L'Impartial)은 하노이를 방문한 채플린에 대해 “조용하고 진지하며, 말투가 느리고, 어딘가 슬픔이 배어 있었다”고 묘사했습니다. 이는 ‘떠돌이’의 익살스러운 몸짓과는 어울리지 않는 묘사지만, 그 캐릭터를 연기한 채플린 본인에게는 잘 어울리는 표현이었습니다. 채플린이 연기한 인물들은 종종 세상의 고난을 짊어졌으며, 이는 그가 어린 시절 겪었던 어려움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던 타임즈》에서 ‘떠돌이’의 고단한 삶에 새로운 사회적 의미가 더해졌다고 해도, 그 캐릭터가 보여주는 연약함은 채플린 자신의 삶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노이에서 일행과 함께 사진을 찍은 채플린(가운데 흰옷 차림). 1936년 4월 29일, 채플린이 하노이에 도착한 날을 날짜로 기재한 《동팝》(Đông Pháp) 신문의 헌정 문구가 사진에 남아 있습니다.
베트남은 채플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내 눈에 이 땅은 이전에 방문했던 곳들과는 크게 다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노이에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산업화의 물결이 아직 같은 모습으로 밀려오지 않은 도시를 만났습니다. 5월 5일, 두 사람은 하롱만(Hạ Long Bay)을 방문하며 베트남 북부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이후 하이퐁(Hải Phòng)을 거쳐 홍콩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중국 광저우로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이 무렵 두 사람이 비밀리에 결혼했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두 사람 모두 이를 공개적으로 확인하지 않았으며 결혼 증명서도 공개된 적이 없습니다.
채플린이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키드》(The Kid, 1921)에서 아역 배우 재키 쿠건(Jackie Coogan)과 함께한 모습
하노이는 채플린이 오랫동안 화면에 담아온 기계와 소음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휴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모던 타임즈》가 공장에서 벗어나는 한 남자를 그렸다면, 하노이에서 채플린은 영화 속 산업화 시대에 아직 완전히 접어들지 않은 도시를 마주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한 대조를 넘어서는 역설이 숨어 있었습니다. 채플린의 부는 산업화와 대량 생산을 기반으로 한 할리우드 시스템에서 비롯됐습니다. 이는 그가 영화에서 조롱하고 비판했던 바로 그 체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근대 사회의 변화에 뒤처진 인물을 연기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덕분에 자신이 희극으로 그려냈던 변화를 이제 막 겪기 시작한 도시에서 평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결국 자신이 비판하던 체제 덕분에 잠시나마 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셈입니다.
탁람에 따르면, 하노이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채플린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하노이는 평화롭습니다. 정말 평화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