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가족이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모습은 휴가라기보다는 대규모 피난처럼 보였습니다. 가방들은 아슬아슬하게 쌓이고, 팔에는 짐이 가득했으며, 재앙에서도 살아남을 만큼의 먹거리가 있었습니다.
뗏(Tết, 설) 전날처럼, 아이들은 아직 잠에서 덜 깨어있고 어른들은 바쁘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모든 가방이 빈틈없이 실리고, 모든 좌석이 채워지기 전까지는 누구도 숨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가족 모두가 동시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 여행이 시작됐다."
첫 번째 볼레로(Bolero) 곡이 채 2절까지 나오기도 전에, 우리 가족의 총사령관인 어머니는 벌써 좌석 아래로 손을 뻗어 어머니가 늘 챙기는 여행 키트를 꺼내십니다. 비닐봉지, 두통약 몇 알, 생수 한 상자, 약용 오일 한 병.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른 새벽부터 정성스럽게 싼 반미짜르아(bánh mì chả lụa)가 들어 있습니다. 배가 고프든 아니든, 앞자리든 뒷자리든 모두가 각각 깔끔하게 종이에 쌓인 걸 하나씩 받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먹어, 기운 차려야지,” 늘 어른들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렸을 땐, 왜 여행마다 반미짜르아를 챙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여행이라는 게 새로운 걸 먹는 거 아니었나요? 붕따우(Vũng Tàu)에서는 해산물, 달랏(Đà Lạt)에서는 고지에서 나는 음식을 먹어야지, 동네 골목 끝에서 매일 살 수 있는 것을 또 먹다니요? 하지만 어른들에게는 그게 바로 이유였습니다. 낯선 곳으로 떠나기 전에, 익숙한 맛으로 속을 든든하게 해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행길이 길든 짧든, 반미짜르아의 한 입은 “정말 떠나는구나”라는 마음속 확인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반미짜르아는 반미 중에 간판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콜드컷 버전처럼 인기 있는 것도 아니고, Anthony Bourdain 이 반해서 세 개나 먹었다던 디푸엉(Dì Phượng)의 반미 가쎄(bánh mì gà xé)처럼 감탄을 자아낸 적도 없습니다.
저는 반미짜르아의 단순함이야말로 최고의 여행 친구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몇 조각의 짜(chả, 돼지고기 햄), 균일하게 썬 오이, 소금과 후추 한 꼬집이면, 제대로 된 집밥을 대신할 만큼의 탄수화물, 단백질, 식이섬유가 균형을 이룹니다. 물론 버터, 파테(pâté), 슈마이(xíu mại), 구운 돼지고기 등은 모두 너무나 좋은 속재료이지만, 좁고 흔들리는데다 햇볕에 달궈진 장거리 버스 안에서는 작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 쉬웠습니다. 반면 반미짜르아는 먹기 편하고, 바가지요금과 이용여부가 의심스러운 휴게소 화장실 복불복 게임에 대비한 보험 같은 존재였습니다.
맛있어 보이는 길거리 음식 판매대를 지나며 마음속에 스며들던 익숙한 아쉬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손에 들린 반미짜르아는 흐물거리고 밋밋했죠.
“응, 먹고 있어요,” 어른들이 물으면 그렇게 중얼대며 조용히 한숨을 쉬었습니다. 빵은 제 무릎 위에서 축 처졌고, 제 얼굴도 꼭 그랬습니다. 그렇게 질질 끌며 먹다 보니, 마지막 한 입은 거의 동나이(Đồng Nai)에 도착했을 때쯤에야 겨우 입에 넣게 되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렇게 평범하던 것이 이제는 그렇게도 닿기 힘든 것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아이들은 집을 떠나고, 형제자매는 멀어졌으며, 한때 북적였던 집은 조용해졌습니다. 가족의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휴가는 비행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먼 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정돈되고 살균된 비행기에는 집에서 만든 음식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대신 우리는 새로운 리듬에 적응했죠. 공항에서 지나치게 비싼 쌀국수를 조용히 홀짝이며. 여전히 밋밋하지만, 이상하게 훨씬 더 비싼.
요즘은 혼자 여행을 다니며, 간단하고 편리한 주먹밥 몇 개로 허기를 달래곤 합니다. 이제는 어른이 되었고, 버스가 출발하기 전 제 손에 따뜻한 반미짜르아를 쥐여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 가장 신선한 바게트를 고르고, 짜(chả)를 해동하고, 오이를 정갈하게 썰어주는 정성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 어머니가 해 주시던 그 방식으로요.
어쩌면 제가 그리운 것은 반미(bánh m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준비하던 다정함이었는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