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안에 반질반질한 산타의 선물 포장지 감촉이 느껴지면, 저는 따뜻함과 경이로움, 그리고 소득계층에 대한 불편이 꿈틀대던 어린 시절의 크리스마스로 돌아갑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보낸 2000년대 중반은 특이한 시기였습니다. 전화회선 인터넷, 플로피 디스크, 무릎 높이의 청바지, 촌스러운 헤어스타일, 그리고 중산층의 열망이 서구의 트렌트와 소비 습관을 만나 무르익었던 시대였죠.
사이공에서 크리스마스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특히 가톨릭 집안에서는), 베트남 대중들 사이에서 이 휴일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 즈음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빌려온 전통과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전통이 뒤섞인 조각보 같았습니다. 축제 분위기는 느리지만 확고하게 거리를 점령했습니다. 집 앞의 예수의 탄생 장면과 대형 쇼핑몰 장식들이 뒤섞였고, 초록과 빨강의 트리용품들이 상점들에서 빠르게 팔려 나갔습니다. “선물하기”는 열정적인 판매원들의 노력 덕분에 시즌의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어렸던 저는 당시 크리스마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디즈니 채널의 스페셜 방송을 너무 많이 본 탓에 크리스마스가 내 지루한 일상을 특별하고 심지어 마법 같은 시간으로 바꿔 줄 것이라고 확신하며 막연히 흥분했습니다. 공예 선생님께서 반 친구들끼리 직접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으라 하셨을 때,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이 쓸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글을 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디즈니에서 보여준 것과는 달리 우리는 모두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은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기 전 저는 산타 할아버지가, 또는 적어도 부모님께서 제 소원을 들어줄 수 있기를 바라며 수많은 힌트를 남겼습니다. 저는 몇 달 동안 열심히 노력해 성적을 상위권으로 유지했으니, 새 헬로키티 또는 바비 백팩, 특히 최신 트렌드 모델 중 하나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크리스마스 밤에 저는 창문을 열어 두었습니다. 베트남 집에는 굴뚝이 없어서 산타가 헷갈릴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산타는 이른 저녁에 이웃집에 도착했습니다. 이웃집 아이들은 같은 옷을 입고 비명을 지르며 기뻐했고, 산타는 웃으며 구겨진 나일론 가방에서 선물을 꺼내 건네주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날 밤 동네에서 산타가 방문한 집은 그 이웃집뿐이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그 산타는 통통하고 분홍빛 뺨을 가진 전형적인 산타클로스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그 산타는 그의 가짜 수염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갈색을 피부와 검은 눈썹을 가진 마른 체형의 남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사슴이 아니라 저희 어머니가 타는 것과 같은 혼다 드림을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물리적, 생물학적 특징엔 아무 관심이 없었고, 단지 제가 아무 선물도 받지 못한 것에 속이 상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가 진짜 우리가 아는 산타가 아니라 하룻밤 동안 고용된 연기자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업적인 면이 저의 희망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선물은 선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크리스마스가 돌아왔을 때, 저는 마치 이상한 연예인 팬미팅과 같은 산타의 방문을 어머니께 조르기 위한 계획을 이미 세워 두었습니다.
현실적인 사람이었던 어머니는 우리의 형편으로는 그런 서비스를 감당할 수 없다고 솔직히 설명했습니다. 저의 걱정은 한 가지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겨우 진정되었습니다. 우리는 대형 쇼핑몰 크리스마스 장식을 보러 가서 무료로 축제 분위기를 즐길 예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다이아몬드 플라자 입구에 있는 트리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우리가 가장 좋은 옷을 입도록 신경 써 주셨습니다. 그 트리는 거대한 플라스틱 트리 장식품, 알록달록한 불빛, 인공 눈송이로 반짝이며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교회 시장에서 작은 탁상용 크리스마스트리와 미니어처 장식들을 하나 사주셨습니다. 돈을 내고 보는 화려한 쇼는 아니었지만, 제 친구들에게 몇 주 동안 자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저의 크리스마스는 굴뚝을 타고 내려오는 산타클로스 보다는 연말 할인 행사를 찾아다니는 일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가족의 연말 식사는 예산이 허락하는 한 조금씩 더 근사해졌고, 리스와 크리스마스 케이크도 더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함께했던 소박한 축제의 추억은 조금씩 더 특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스스로 공과금을 내고 있는 지금, 당시 어머니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짜 크리스마스 기적은 시간이 지나며 우리가 깨닫게 되는 부모님의 사랑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