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사이공 거리를 걷다 보면 얼음은 너무나 흔해서 마치 도시 풍경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짜다(trà đá), 카페쓰어다(cà phê sữa đá), 신또(sinh tố)에 이르기까지, 무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거의 모든 음료에 얼음을 넣어 마십니다. 그러나 프랑스가 베트남에 제빙 공장을 들여오기 전만 해도 사이공처럼 무더운 열대 도시에서 얼음을 찾아보기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오늘날 저온 유통망 관리는 의약품과 식품의 저장·운송을 막론하고 물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새로운 식재료를 활용한 요리의 범위를 넓히는 데에도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몇 세기 전만 해도 얼음은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을 상대로 번성한 사업이었습니다.
열대 기후에서 얼음 만들기
역사적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열대 기후의 특성을 활용해 식품의 안전과 보관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농산물의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 발효 방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갈증을 달래기 위해 뜨거운 차를 마시거나 점토 항아리에 물을 담아 수온을 몇 도 낮췄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주민들이 베트남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현지 주민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신들의 기준에 맞는 안락한 삶을 누리려는 욕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국에서 가져올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간절히 원했던 사치품 가운데 하나는 차가운 맥주였습니다. 북미의 얼어붙은 호수에서 채취한 얼음을 거래하는 사업이 인도,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의 주요 항구에서 번성했던 반면, 베트남 항구로 얼음을 수입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베트남의 항구에도 얼음이 수입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지만, 관련 기록이 없다는 사실은 수입량이 적었고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정기적으로 얼음을 판매하는 업자가 없다는 사실은 시장의 공백을 드러냈고, 이는 수익성 높은 산업이 성장할 길을 열었습니다. 이 기회를 가장 먼저 포착한 사람은 프랑스인 형제인 빅토르 라뤼(Victor Larue)와 가브리엘 라뤼(Gabriel Larue)였습니다. 빅토르는 1879년 사이공에 도착하자마자 얼음 판매를 시작했고, 이후 동생도 사업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1886년 사업 규모가 확대되기 전까지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해 라뤼 형제는 무게가 14만 킬로그램에 달하는 제빙 기계를 수입하고 하이퐁에 두 번째 공장을 건설했습니다.
사이공의 라뤼 제빙 공장 내부. 사진 출처: Les entreprises coloniales françaises.
라뤼 형제는 수년에 걸쳐 공장에 여러 종류의 기계를 들여왔습니다. 압축식 냉동기든 흡수식 냉동기든 핵심 원리는 같았습니다. 제빙은 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옮기는 연속적인 순환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압축기에서 시작됩니다. 압축기는 저압 가스를 빨아들여 고압의 뜨거운 증기로 압축합니다. 라뤼 형제는 1879년에 암모니아 1만 5천 킬로그램을 수입해 냉매로 사용했습니다. 이 증기는 응축기로 들어가 주변 공기로 열을 방출한 뒤 고압의 액체로 변합니다. 액체가 스로틀 밸브(throttle valve)를 통과하면 압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온도도 순식간에 낮아집니다. 마지막으로 차가워진 유체는 물에 잠겨 있거나 물로 둘러싸인 증발기 코일로 들어갑니다. 냉매는 배관의 금속 벽을 통해 물의 열을 흡수하며, 물이 얼음으로 굳을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주요 고객은 식당이나 술집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사용할 얼음를 구매하려는 개인 소비자까지 포함했습니다. 얼음을 구매하려면 미리 선불 쿠폰을 구입해야 했으며, 최소 구매량은 1킬로그램이었습니다.
라뤼 형제만이 베트남에서 제빙업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1886년 베르투앵(Berthoin)이라는 사업가가 하노이에 제빙 공장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경영 능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운이 따르지 않았던 탓인지 그는 사업을 오래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얼음 가격은 킬로그램당 10센트로, 오늘날 가치로 약 2.5유로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는 2년 뒤 가격을 킬로그램당 6센트로 내려야 했습니다. 같은 해 베르투앵은 경쟁사가 자사와 같은 배색을 사용해 자신의 쿠폰과 지나치게 비슷한 쿠폰을 판매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습니다. 이듬해 여름에는 베르투앵이 새 공장을 짓기 위해 기존 공장을 철거하면서 하노이에 얼음 부족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공급이 수요를 크게 따라가지 못하자 일부 사람들은 가족이 사용할 얼음을 구하기 위해 네 시간 넘게 줄을 서야 했습니다.
라뤼 형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1893년 베르투앵의 공장을 인수하고, 이미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하이퐁과 가까운 하노이로 사업을 확장했습니다.
하이퐁의 라뤼 제빙 공장 얼음 저장고. 사진 출처: Les entreprises coloniales françaises.
하지만 제빙 공장을 운영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주요 문제 가운데 하나는 물의 질이었습니다. 이는 얼음의 맛을 해칠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하게는 사람들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었습니다. 쓰레기가 버려지는 강에서 물을 길어 올렸기 때문에 사람들은 질병이 더욱 빠르게 퍼질까 우려했습니다. 특히 당시 아시아에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가 가장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1895년 하이퐁과 하노이에서는 많은 고객이 얼음의 품질에 불만을 제기했습니다. 얼음 안으로 붉은 얼룩이 비쳤고 썩은 맛까지 났기 때문입니다. 이듬해 하노이에서는 더 좋은 물을 확보하기 위해 우물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라뤼 형제의 성공은 특히 양조 업계의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얼음과 맥주 사업은 냉각이 필수라는 점에서 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맥주의 발효 과정은 일정한 온도에서 이루어져야 하므로, 액체를 차갑게 유지하는 능력은 양질의 맥주를 생산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라뤼 형제는 이미 1909년에 양조업에 진출해 자체 브랜드인 ‘라뤼’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맥주는 오늘날까지도 판매되고 있습니다.
1934년 4월 26일 자 신문 《랭포르마시옹 댕도신》(L’Information d’Indochine)에 실린 라뤼 맥주 광고. 이미지 출처: Les entreprises coloniales françaises.
또 다른 식민지 가문인 드니(Denis) 형제는 처음에는 인도차이나로 물품을 수출입하는 사업에 종사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밀접하게 연결돼 있던 두 산업을 하나로 통합할 기회를 포착하고, 1927년 ‘브라스리 에 글라시에르 드 랭도신(Brasserie et Glacière de l’Indochine)’을 설립했습니다. 드니 형제는 라뤼 형제의 사업체와 브라스리 오멜(Brasserie Hommel)을 비롯한 다른 양조장들을 인수하며 단숨에 막강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이후 ‘브라스리 에 글라시에르 앵테르나시오날(Brasseries et Glacières Internationales)’로 명칭을 변경한 이 회사는 수많은 프랑스 식민지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자회사를 둔 국제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오늘날 이 회사는 특히 아프리카 맥주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통킹(Tonkin) 하노이에 위치한 오멜 양조장 외부. 사진 출처: Les entreprises coloniales françaises.
현지인의 희생 위에 세워진 식민 개척자들의 사업
제빙 사업은 언제나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싶어 했던 프랑스 식민지 개척자들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식민지라는 맥락에서 그들의 욕구는 베트남인들의 희생 위에서 충족되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착취적인 노동에 의존했고, 공공위생보다 자신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우선했습니다.
하노이의 라뤼 제빙 공장. 사진 출처: Les entreprises coloniales françaises.
제빙 공장과 양조장에서 일한 노동자들은 현지인이었으며, 이들과 식민지 개척자들의 관계는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특징지어졌습니다. 베트남인들은 백인 정착민들을 위해 일하는 노동력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1895년 5월 18일 자 《라브니르 뒤 통킹》(L’Avenir du Tonkin)에 실린 다음 기사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기사는 한 프랑스 의사가 질 낮은 얼음 문제를 지적하고, 현지 베트남 여성을 가리키는 프랑스 식민지 표현인 ‘콩가이(congaï, 베트남어 con gái에서 유래)’를 이용한 해결책을 제시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브라스리 에 글라시에르 드 랭도신은 막대한 수익을 올렸습니다. 1930년 이 회사는 32만 9,714피아스트르(piastre)의 순이익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2025년 가치로 약 230만 유로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다음 기사에서 언급된 것처럼 프랑스 정착민들은 값싼 현지 노동자들을 단순한 도구로 취급하고 착취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전적으로 정착민들만 소비하던 사치품인 ‘차가운 맥주’를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도이머이(Đổi Mới) 이후 외국 기업들이 시장에 진출하면서 가정용 냉장고가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가정에서도 식품을 더 안전하게, 더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베트남에서 소비되는 얼음의 대부분은 지금도 산업용 제빙 시설에서 생산됩니다.
역사적으로 얼음은 베트남에서 맥주가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맥주는 프랑스 식민지 지배자들이 즐겨 마시던 음료였지만, 베트남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얼음과 맥주를 함께 즐기는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서양의 음주 방식과 달리 맥주에 얼음을 넣어 마시는 것을 즐깁니다. 베트남의 역사 속에서 제빙 공장은 꾸준히 확장되었고, 이는 연유를 넣은 ‘카페 쓰어 다(cà phê sữa đá)’와 같은 독창적인 차가운 음료가 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처럼 소박하게 시작된 베트남의 차가운 음료 문화는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